서울,경기도 사찰

용문산 용문사

Pine Tree(소나무) 2008. 2. 20. 22:33

 

 

2007, 11, 18 (일)

양평 용문산 용문사

 

 

지인들의 모임을 대명콘도에서 갖고 홍천 화로구이에서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용문산 용문사에 들려 초겨울의 사찰을 둘러 보았다.

 

쌀쌀한 날씨는 이미 늦가을을 넘어서서 초겨울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이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의 기금을 모금하고 있는 숲속 악사의 은은한 노래가

주위의 초겨울 풍경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계곡의 모습과 용문사의 자랑거리인 천연기념물 30호인 은행나무도

은행잎을 모두 벗어버리고 쓸쓸한 가지만 높게 보이고 나무 밑은 샛노란 은행잎으로 장식했지만

떨어진 은행에서 풍기는 냄새는 주변에 오래 머물수 없게 만든다. 

 

찬 공기에 노출된 손이 시렵고 차갑고 빨개진 얼굴을 

귀틀집처럼 꾸며진 분위기 좋은 전통 찻집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벽난로 옆에서 따뜻한 대추차 한잔을 으로 녹이니

그렇게 벌써 겨울은 내곁에  다가와 있슴을 느낄수 있었다.

 

 대명 리조트

 

  홍천 화로구이 마을

 

 용문산 용문사 입구

 

 용문 8경시 비

 

 친환경 농업박물관

 

 도연명의 좋은글. 이런 좋은글이 용문사에 도착할 때까지 많이 보인다.

 

 용문산 입구 공원을 일주하는 마차

 

 은행나무 제단

 

 용문사 일주문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베풀기 모금을 하고 있는 숲속의 악사

 

 솥안에서 밤이 돌아가며 구워지고 있다.

 

 귀틀집 형태의 전통찻집

 

 을씨년스런 용문사 계곡

 

 용문사의 자랑거리 천연기념물 30호 은행나무

 

  용문사 경내 앞에 자리한 이 은행나무는 일명 정삼품송(正三品松)이라고도 부르는데,

  용문사의 창건설화와 관련 있는 유서 깊은 거목이다.

  수령이 1,100년 정도 되며 그 크기도 높이 60여m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4m가  넘는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로서 1962년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에 은거하기 위해 가던 길에 심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신라의 의상 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거듭되는 국난 속에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아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했는데, 이를 기념하듯 나무 앞에는

  ‘四方護世四大天王 南無統領八部四大天王 南無四天王上一切賢聖’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로 인해 세조 때 정3품 이상의 벼슬에게 주는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고종이 승하 했을 때는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미리 알려주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했다가 천둥과 번개가 일어 그만 둔 적이 있으며 그 때의 도끼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은행나무 밑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과 은행

 

 

 자비로운 자에게는 적이 없다는 말이겠지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대웅전

  용문사의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건물로 최근에 지었다.

  안에는 중앙의 불단에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삼면의 벽에 작은 천불(千佛)을 가득 봉안했다. 또한 신중탱과 천수관음 불화,

  그리고 동종 이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서울 봉은사에 걸려 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근래에 번각(飜刻)한 것이다.

  용문사의 대웅전은 1983년 이 종걸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단청은 박정원이 했다고 한다.

 

 

 

  대웅전 앞뜰의 3층석탑 .   

  용문사의 삼층석탑은 1989년 선걸 스님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선방.  가지런하게 세워진 고무신이 정겹다

 

  대웅전의 불상 .

  용문사의 대웅전은 1983년 이 종걸 스님이 조선한 것으로 대웅전에는 삼존불상을 보시고 있는데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관음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시고 있으며 1984년에 봉안한 것이다

 

  국화를 조각해 놓은 대웅전 문살

 

 대웅전 편액과 용머리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의 단청과 용머리

 

 대웅전 외부의 십우도 벽화의 일부

 

 삼성각

 용문사의 삼성각은 1985년 주지 이 선걸 스님이 조성한 것이며 단청은 박정원이 한 것이다.

 삼성각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건물로 근대에 지었다.

 안에는 1985년에 조성한 칠성탱·독성탱·산신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삼성각(三聖閣)' 편액은 봉선사 월운(月雲) 스님의 글씨다.

 

 삼성각 내부

 

 곳곳에 놓여진 동자승 모습

 

 은행나무와 3층석탑,그리고 대웅전의 풍경

 

 대웅전 전경

 

 범종각

 

   목어

 

 종의 문양

 

 범종의 모습

 

 범종의 용뉴 부분

 

 지장전

 

  지장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1993년 최기영씨가 건축하였고, 단청은 박정원씨가 한 것이다.

  기와는 보기 드물게 청기와로 덮었으며 지장전 안에는 근래에 봉안한 금동 지장보살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불화로는 후불탱과 시왕탱 10폭이 있다. 외부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있는 내용을 벽화로 그렸다.

 

 '지장전(地藏殿)' 편액은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1973년에 쓴 것이며

  일주문의 '용문산용문사' 글씨도 그의 작품이라 한다.

 

 샘터

 

 팔각정 형태로 새로 지은 관음전

  예전에는 미륵불상이 서있던 자리에 지은지 얼마 안돼 보이는 팔각정 형태의 관음전이 단청도 아직 칠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고

  예전의 미륵불상은 어디에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관음전 내부의 모습. 목조관음보살좌상

 

  관음전 안에는 관음보살좌상과 후불탱이 있다. 관음상은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의 소매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이루고 있으며 두 무릎을 덮고 있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보살상 양식을 볼 수 있다.

  포항 장륙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나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보다는 신체의 표현이 덜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이들 작품보다는 시대가 약간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표현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것이

  조선시대 초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나타내주고 있는 듯 하여 조형성(造形性)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개금은 근래에 한 것이다.  크기는 무릎 너비 41㎝, 앉은 높이 76㎝이다

 

 용문사 사적비

 

 용문사의 부도.

  용문사를 거쳐 가신 분들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 분들의 부도를 함께 모아 둔 곳이다.

 

  멀리서 본 은행나무

  

  위에서 본 전통찻집

 

 

  전통찻집의 벽난로

 

 주전자. 밑에서 연료를 때 물을 끓이게 되어있다

 

  전통찻집의 메뉴

 

 

  전통찻집의 천정

 

 전통찻집 내부

 

  향기가 진한 대추차

 

 

  내려와서 본 용문산.      정상이 최근에 개방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