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2008. 07. 31.
대련사를 떠나 성주사지로 간다.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주차장앞 성지사지 안내문
5층석탑옆의 석등
5층석탑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만든 건조물인데, 후에 절 배치의 필요에 의해 상징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탑은 2층의 받침돌과 5층의 몸돌 그리고 상륜부로 되어있다. 1층 탑신의 뒷면에는 사리장치가 있으나 유물은 없고, 사리 넣는 공간을 막는 돌로 된 뚜껑만이 남아 있었다. 금당지 앞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불탑으로 볼 수 있다. 층급 받침이 4단이고 기단과 1층 몸돌 사이에 별도의 괴임돌을 갖추고 있어, 신라 말에서 고려로 이행되어 가는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주사 금당지 뒤쪽에 세워진 석탑 3기와 함께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계단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聖住寺) 금당(金堂)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목에 방울이 달린 석수(石獸)가 있었으나 현재는 계단만 남아 있다. 터만 남아있는 금당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삼층석탑
보물47호.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탑과 석비,귀부,석축,초석.등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 있다.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하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석탑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의 이루는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는 짐승얼굴 모양의 고리1쌍 조각하였다.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네 귀퉁이는 경쾌하며 약간 치켜올라갔다.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보수 당시 1층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있었다고 한다.함께 위치한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을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중앙3층석탑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얼굴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
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동삼층석탑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聖住寺) 창건시기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삼층탑이다. 성주사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것이다. 서쪽에 있는 서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이지만 높이 4.6m로 크기가 다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중앙삼층석탑은 보물 제20호,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47호, 동삼층석탑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이다.
이중 기단 위에 탑신(塔身)이 3층 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1971년 해체한 뒤 수리하였고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국보급인 낭혜화상 백원보광 탑비(국보 8호)는 지금도 비각속에 그 모습을 찬연히 빛내고 있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신라에서 전해 오는 부도비중 가장 큰 것으로 88세에 입적한 낭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입적 두해 뒤에 제작된 것으로 성주산의 남포오석으로 만들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더 발한다는 것이다. 높이 4.5미터, 폭 1.5미터, 두께 42센티미터로 5천여자의 한자로 새겨져 쉽게 읽어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