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천호산 개태사
2008. 08. 01.
개태사는 개태사역옆 도로변에 있는 사찰이다. 초하루 법회가 있는 날이라 어르신들이 많이 오셔서 한참 기도를
하고 계시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개태사 천왕문
개태사 사주문
오층석탑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개국사찰(開國寺刹) 개태사지(開泰寺址) 경내에 있던 것으로 1946년 승려 김광영(金光榮)이 새로지은 개태사로 옮겨왔다.
탑의 높이는 4.69m, 폭 1.8m이다. 이건(移建) 당시에 기단부의 일부가 유실된 상태로 현재의 위치에 옮긴 것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기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탑신에는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하였고 옥개석에는 4단의 옥개받침과 탑신괴임을 각출하였다.
조각 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연봉(蓮峰)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화대보궁현판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이 삼존석상(三尊石像)은 그 당시에 조성한 주존불(主尊佛)로 추정된다. 이들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얼굴에 비해서 눈과 귀가 다소 크고 길게 표현 되었으며, 거의 원통형에 가까운 체구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져 다소 부자연스럽다. 탄력이 감소된 신체굴곡, 크게 표현된 손과 발, 사각형으로 깎아 발가락만을 선각(線刻)으로 표현한 양 다리 등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좌우의 보살상(菩薩像) 역시 본존과 동일한 수법이나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상의(裳衣)에는 비교적 섬세한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는 지방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불상이지만 제작 시기가 거의 확실하고, 고려의 후삼국통일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고려(高麗) 전기(前期) 지방 석불상으로서는 수작(秀作)에 속하고 있어서 이 삼존불상의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정법궁
팔각전각
팔각전 현판
우주정 철확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개국 사찰로 창건한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형 철재솥이다.
개태사가 폐찰(廢刹)되자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뒤 조선시대인 1887년(고종 24) 대홍수로 2km 정도 하류로 떠내려 왔다는 설이 있고, 큰 가뭄에 이 솥을 다른 곳에 옮기면 비가 온다는 전설도 있어 연산 부근에 옮겨오게 되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출품했다가 한동안 연산공원에 전시되었으며, 1981년 현재의 자리인 개태사로 옮겨왔다.
형태는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를 제쳐놓은 듯한 모양이며 크기는 직경 3m, 높이 1m이고 두께는 3cm 내외이다. 23cm 높이의 테가 곧바로 서 있고 그 아래로 20cm 정도가 경사면을 이루다가 다시 급경사를 이루면서 둥근 바닥을 이루고 있다. 승려의 식사에 쓰이던 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로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전설에 따르면 일제가 무기제작용 철을 수집하기 위하여 철확을 부수던 중 천둥, 번개가 일고 세찬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므로 모두 무서워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때 파손된 부분이 현재 테두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