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 영수사
2008. 11. 16.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법주사의 말사이다. 918년(고려 태조 원년) 두타산(598m) 자락에 증통국사가 창건하고 1624년(조선 인조 2) 벽암대사가 중건하였다. 1831년(순조 31) 지방민의 후원을 받아 요익이 중수하고 1947년에는 응택이 중건하였다. 사찰 뒤편에 있는 영천(靈泉) 약수가 만병통치라고 알려진 데서 사찰명이 유래한다고 하며, 이곳에는 한여름에도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흘렀다 한다. 저녁놀이 질 무렵 이 절에서 치는 종소리를 두타모종(頭陀暮鐘)이라 하여 진천군 상산팔경(常山八景)의 하나로 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괘불(충북유형문화재 44)을 보관하고 있다. 이 괘불은 본래 진천읍 상계리 백련암에 있던 것을 암자가 폐허가 되자 이곳으로 옮겨와 매년 4월 초파일이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이 모시(저포)에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일주문
대웅전 오르는 계단..
영수사는 두타산 자락에 남서향(南西向)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주차장은 숲인 듯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앞으로는 반지하 형태의 요사가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다. 이 요사 한쪽에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영수사의 경내이다. 사역의 왼쪽으로는 관음보전이, 왼쪽으로는 요사가 서로 마주하여 우뚝 서 있고 마당의 한 가운데에는 5층석탑이 자리한다. 요사 뒤로는 석조미륵불 입상과 영수사사적비가 자리한다. 영수사의 중심 법전인 대웅전은 높다란 축대위에 자리하여 관음전과 요사를 굽어보고 있고, 대웅전 왼쪽으로는 원래 영수사의 법전이었던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삼성각 옆에는 근래에 세운 괘불석주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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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사사적비
종무소
대웅전
늦은 시간이라 서둘러 대웅전에 들어서니 마침 스님께서 불을 끄고 문을 잠그는 중이다.
우리가 불을 끄고 나오겠다 하니 웃으시며 그리하라 하신다.
괘불대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괘불로 원래 이름은 석가모니괘축불상이다.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골의 백련암에 있었으나 암자가 폐허화하면서 괘불만 영수암으로 옮겨와 매년 4월 초파일에 공개된다.
야외 법회 때 걸어놓고 의식에 사용하는 괘불탱화로, 길이 8.35m, 폭 5.79m 크기이다.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으로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상단에는 부처와 일행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설법을 듣는 신도들이 밝은 색상에 유려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상단의 중앙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석가모니불이 높은 대좌(臺座)에 키형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그 주위에 보살상·제자상\·타방불(他方佛)·사천왕\·팔부신중(八部神衆) 등 많은 성중(聖重)들이 등을 보이며 꿇어앉아 법문을 청하는 모습이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어 있고 하단의 많은 신도들도 작게 표현되어 있다.
묵기에 의하면 순치 10년(1653) 7월에 화주 심인 법사의 발원에 의하여 화원·비구\·명옥·소즙\·현욱·법능이 그렸다고 한다. 가뭄이 심한 해에는 이 괘불을 높이 걸고 수행중인 승려들이 기우 기도를 드리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
5층석탑
삼성각
관음보전 이미 문이 잠겨 있어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다.
사찰을 둘러보고 나오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 등불을 밝혀 놓았다.
계획을 세운 곳은 아직 두 곳이나 남았지만 다른 날 둘러보기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