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백담사
설악산 백담사
2012,11,16(금)
맑음
오래전 부터 가려고 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었는데
모처럼 기회가 생겨 백담사로 향한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최근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머무른 곳으로도 잘 알려지기도 하였다.
백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이 절에 관한 기록으로는 ‘설악산심원사사적기’ 와 한용운이 편찬한 ‘백담사사적’이 있다.
이 절은 647년 자장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절 이름을 한계사라 했다고 하며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719년에 재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며 절 이름이 계속 바뀌게 된다.
비금사,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축사, 백담사, 심원사로 바뀌었으며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백담사로 불리게 될 때까지 7차에 걸친 실화가 있었고
그 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진 이름이라는 것을 전설로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고 한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담)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산내의 부속 암자는 현존하는 것보다 이미 폐허가 된 것이 많다고 한다.
한용운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는 암자가 11개가 있었다고 ‘백담사사적’에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선실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주석하다가 관음진신을 친견한 뒤
관음암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다섯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바꾼 오세암,
1648년 유학자 김창흡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옛 절터에 1903년 원호가 세운 원명암 등이 있다.
용대리에 도착해 마을버스를 타고 (요금 2,000원) 구불거리는 백담계곡을 지나 약 10여분 후에
백담사 앞 주차장에 도착한다.
단풍 관광철이 지나 조금은 한적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버스안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버스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사리탑 이다.
수심교를 지나며 보이는 백담사 전경
예전의 다리 근처에는 크고 작은 돌탑들이 빼곡하게 계곡을 메우고 있다.
수심교를 건너면 금강문을 지나게 된다.
문수보살과 금강역사
보현보살과 금강역사
솟을문의 백담사 현판
사찰의 문(門)은 보통 세 문으로 구성된다.
사찰의 입구에 있는 일주문과 그 문을 들어서면 바로 부처님이 계신 도량임을 나타내는 천왕문,
그리고 부처님이 설법하고 계신 내도량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백담사의 문은 불교적인 문의 정형을 완전히 벗어난 특이한 것으로
일주문의 구조도, 천왕문이나 불이문의 구조도 아니다.
앞면 3칸 중 중간 칸의 지붕을 양측 칸의 것보다 높게 하여 꾸민 솟을 삼문인 것이 특색이다.
지붕도 맞배지붕으로 처리하고 문짝의 크기도 중앙 칸의 것을 양측 칸의 것보다 크게 하여 솟을삼문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다만 중앙 칸만 통로로 사용하고 양측 칸을 막아서 사람들이 다닐 수 없도록 한 것이 일반적인 솟을 삼문과의 차이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 솟을 삼문은 종묘나 재실?사당?서원 등의 대문으로 많이 사용되며,
그 중앙 칸은 신들이 다니는 신도(神道)로, 양 측칸의 문은 제주(祭主)나 일반인의 출입구로 이용되고 있다.
1957년의 중건 때 주변의 어느 서원이나 사당의 건물을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농암실(백담다원), 너와지붕의 모습이 특이하다.
농암실 입구의 어록
농암실 내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선방으로 활용되는 요사채 인가 보다.
범종각
만해기념관
만해당과 만해기념관
만해 동상과 시비
백담사는 만해사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강한 회의로 평범한 삶을 포기한 스님은 백담사를 출가처로 삼아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禪)과 염불수행에 몰두하였고 불경을 깊이 있게 섭렵하였다.
그 결과 스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금강괴불의 마음을 평상심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스님은 이 땅 전체를 커다란 감옥으로 여기고 죽을 때까지 거처하던 방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
숱한 조선의 지성인들이 변절의 모습을 보일 때, 이를 애석히 여긴 스님은,
“청년아, 만지풍설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본받으라”고 설파 하셨다.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요 시인이었던 한용운 스님, 백담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지만
그와 관련된 유물은 매우 적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비의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비에는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스님의 대표시 ' 나룻배와 행인'이 앞면에 한글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한문으로 새겨 놓았다.
나이 39세가 되던 1917년 겨울, 백담사의 오세암에서 좌선삼매에 들었던 스님은
불어오는 바람의 힘에 의해 그 어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오랫동안 품었던 마음 속의 의심이 씻은 듯이 풀렸다고 한다.
음력 섣달 초사흩날 밤 10시경의 일이었다.
스님은 그때의 깨달은 경지를 한수의 시로 나타내었다.
‘남아에겐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몇 사람이나 나그네의 설움 속에 길이 갇혔나.
일성을 버럭 질러 삼천세계 뒤흔드니 눈 속의 복사꽃이 붉게 흩날리누나.’
이 오도송은 현재 법화실 오른쪽에 자리한 요사 만해당의 주련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만해기념관의 어록
만해기념관의 동상
나한전
나한전에는 석가삼존상을 중심으로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이란 아라한을 의미하며 응공(應供)으로 한역되며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자'라는 의미이다.
안에는 금동 석가여래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와 뒤쪽에 1960년에 조성한 18나한상을 비롯한
500나한상, 시봉, 신장 등이 모셔진 불단이 있다.
중앙의 삼존불은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상이다.
불화로는 1927년에 조성한 나한탱이 있다.
그림에는 모두 130분의 나한상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오백나한도의 일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래의 백담사에는 이와 같은 불화가 세 폭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화 속에 그려진 한 스님 한 스님의 표정은 하나같이 뚜렷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고 손모양이나 자세가 모두 다르다.
비록 오래된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오백나한도가 흔치 않다는 현실에 입각해 볼 때
이 탱화는 잘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한전 옆의 수조
극락보전
정면 5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불단에는 설법인(說法印)을 결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불단의 오른쪽에는 지장 보살상과 지장탱화를 봉안하였으며 왼쪽에는 신중탱이 걸려 있다.
본래 대웅전이라 하였으나 1991년 증축불사 때 지금처럼 극락보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다.
현재의 편액은 전두환 대통령의 글씨다.
1987년에 만든 정면문의 꽃창살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으며,
외벽에는 수행자가 본성을 찾는 것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폭의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복장유물(腹藏遺物)은 만자소화(卍字小花) 무늬의 삼회장저고리는 1748년(영조 24) 저고리로서
상태가 매우 아름답고 색상이 선명하며 바느질상태가 고르다.
끝동은 만자소화문(卍字小花紋) 자색단, 고름은 떨어져 없으나
고름 달렸던 자리가 2.5㎝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고름이 있었다(너비 2.5㎝).
일반적으로 삼회장저고리일 경우에 깃과 곁마기와 고름은 같은 옷감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 고름도 깃과 같은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 자색단이었을 것이다.
저고리의 주인공은 깃과 곁마기의 만자운용문(卍字雲龍紋)자단색으로 보아
궁중의 왕족이거나 왕실과 관계된 신분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저고리는 당대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기타 복장물은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 수백 점을 보자기에 싼 것으로 복장물로 대체한 것이다.
목조 삼존불상과 복장유물은 현재 보물 제1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의 삼존불
보물 1182호 안내판
극락보전 앞의 삼층석탑
산령각
극락보전 뒤 왼쪽에는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1칸씩의 최근에 지은 산령각이 있다.
설악산의 산신이 그 어느 산의 산신들보다 격이 높다고 하여 ‘山神閣’이라 하지 않고 ‘山靈閣’이라 편액하였다고 한다.
화엄실. 만해스님이 사용하던 곳이었으며 전 전대통령이 사용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웅전 앞 좌우에는 현재 요사로 사용하는 법화실(法華室)과 전직 대통령이 기거했던 화엄실(華嚴室)이 있다.
백담사에 화엄실이라는 이름의 요사채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1919년이고, 법화실이 생긴 것은 1921년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법당 좌우의 건물에 이름을 붙일 때 ‘심검당(尋劍堂)과 설선당(說禪堂)’ 또는
‘선당(禪堂)과 승당(僧堂)’이라는 칭호를 많이 쓴다.
이는 곧 백담사가 선을 지향하기보다는 불교의 최고 경전인 화엄경과 법화경을 공부하는 강원의 성격이 강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귀중한 사료가 되는 것이다.
이 이름은 화엄경에 통달한 고승으로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문 한용운 스님의 영향으로 보인다.
화엄실 내부모습
법화실.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만해교육관
극락보전 우측의 요사채 전경
만해적선당, 매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요사채 입구의 모습.
예전의 다리에서 본 수심교
예전의 다리
계곡을 꽉 채운 크고 작은 돌탑들의 모습
백담사 전경
백담사 안내판
백담사 입구
백담사 안내문
일주문을 지나 백담사로 들어오는 길
백담사를 둘러본 후 영시암을 가고자 했으나 국립공원 산불방지기간이라영시암으로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영시암으로 가지 못하고 용대리까지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가며 한가롭고 멋진 백담계곡의 늦가을 풍경에 매료된다.
백담사 일주문
일주문 현판
백담계곡의 모습과 관리공단 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