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25 (일)
안성 칠현산 칠장사
당숙집에 잔치가 있어 안성에 갈일이 생겼다.
안성 대림동산 웨딩홀에 들린후 임꺽정으로 유명한 칠장사에 들려오기로 하였다.
대림동산은 예전엔 놀이기구도 있는 넓은 놀이공간이었다 하는데
지금은 작은 공원과 공원 뒷편에 웨딩홀이 자리하고 있다.
볼일을 마친후 38번 국도를 따라 죽산방향으로 차를 달리다 진천방향의 17번 국도로 진입하면
칠장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칠장사에 다다른다.
주차장 뒤에 보이는 일주문을 통과하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고즈녁한 칠장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림동산 뒤에 보이는 웨딩홀
칠장사 주차장과 일주문
일주문
일주문을 통과하면 좌측의 나무사이로 난 길과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나뉘어져 있고 그 위로 칠장사의 모습이 보이는데
시간이 약간 늦은탓인지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아 조용한 분위기가 초겨울의 느낌과 잘 어울린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칠장사
천왕문과 소조 사천왕상
범종루
범종
목어
운판
용뉴부분
범종의 문양
감로수
단청이 모두 벗겨진 대웅전을 보며 고찰임을 알 수 있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매우 오래된 양식이며 그 위에 세운 목조건물은 조선시대 말기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4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제일 윗부분과 아래 장대석의 사이는 깊은 홈을 파서 단을 구획하였다. 이 부분은 궁궐건축의 기단에서는 약간 턱을 두는 정도로 처리하는데 이 건물의 경우는 그 기법이 독특하다. 기단 중앙에 있는 계단의 좌우 우석은 위를 약간 둥글게 돌렸으며 우석 측면에는 구름 모양을 돋을새김해 넣었다.
주춧돌은 전면의 4기와 제2열의 양 측면의 2기는 잘 다듬은 것이고 나머지 것은 자연석이다. 전면의 다듬은 주춧돌들은 전체를 네모나게 가공하고 위에 원형의 주조를 두었으며 주좌에는 둥글게 홈을 넣었고, 고맥이까지 뚜렷이 만들었다. 주춧돌의 형상을 보아 칠장사의 창건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주춧돌은 대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중기까지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건물은 약간의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다포식의 공포를 짰는데, 공포의 형상은 조선시대 말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살미첨차가 수평으로 뻗으면서 그 끝에 연꽃을 조각한 장식이 가미되고 내부의 끝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지붕은 간단한 맞배지붕인데 지붕 용마루 양끝에 취두를 두었다. 법당 건물에 취두를 올려놓은 것은 대개 조선시대 말기 고종 때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웅전 앞의 당간지주와 계단
대웅전
대웅전 내부의 삼존불상
대웅전 앞뜰의 삼층석탑
삼층석탑-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절이 신성한 곳임을 상징하는 곳이며 진신사리는 모시기 어렵고, 다라니경 등 부처님 말씀을 주로 탑 내부에 봉안한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곳을 적멸보궁(우리나라 경우-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이라고 한다.
봉업사 석불입상
보물 제 983호 봉업사 석불입상은 원래 안성의 봉업사에 있던것을 칠장사로 옮겨 놓은것이라 한다.
불상은 큼직하고 깨끗한 화강암 꽃무늬 대좌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은 눈, 코, 부분의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옆에 있는 작은 불상들이 앙증맞게 보인다.
원통전 앞의 석탑
원통전
원통전 내부의 불상
사제관
명부전 벽화에 임꺽정과 더불어 신라 왕실의 서자로 유모의 눈에 찔려 한쪽 눈을 잃은 궁예의 벽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 칠장사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활쏘기를 익혔다고 합니다. 명부전 뒤편의 궁지(弓地)가 바로 유년기를 보내며 활쏘기를 한 곳이며, 활을 잘 쏘아서 궁예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명부전 벽화 . 궁예와 임꺽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중루와 범종루
산신각과 혜소국사비 올라가는 계단
칠장사 전경
무슨 석조물 이었는지 궁금하다
무슨 석조물 이었는지 궁금하다
산신각
나한전 내부의 모습
나한전은 박문수가 어머니가 만들어준 조청으로 만든 유과를 이곳 나한전에 공양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한 곳으로, 박문수의 꿈에 과거시험의 시제(夢中登科時)가 그대로 나와 급제했다 한다. 박문수는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史官), 병조정랑,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 어영대장, 호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암행어사란 임금의 명을 받고 신분을 숨긴 채 돌아다니며 지방 관리들을 감독하는 직책으로 암행어사는 파견 지역에 도착한 뒤 또는 서울을 벗어난 후에야 임금이 내린 어찰을 뜯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금의 밀지가 사전에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조선조 내내 과거 시험에 장원을 꿈꾸던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수험생이나 수험생 자녀를 둔 분들은 이곳에 과자 공양을 하면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620년 수령의 소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혜소국사비 뒤의 요사채
오래된듯한 단풍나무. 가을엔 멋지게 보일것 같다.
공덕비
부도탑
부도위의 거북이 모습
샘터와 샘물
궁예가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장소. 우측끝에 부도탑이 있다.
활터와 공덕비
내려가며 본 일주문
뒤돌아 본 칠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