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07
간밤에 중부지방에 눈이 많이 온다는 뉴스가 나와 제일병원의 외래를 미루려고 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포근해서 병원의 외래를
다녀서 그옆에 있는 남산 한옥마을을 둘러봤다.
여름에 가면 쉴곳도 많고 더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있었으나 오랜시간을
보내기는 추운 그런 날씨였다.
남산골 전통정원은 남산의 산세를 살려 자연식생인 전통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정자,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특별시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캡슐을 지하 15m에 수장해 둔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


정자

연못

도편수 이승업 가옥
서울 팔대가(八大家) 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이 가옥은 조선 제25대 철종(哲宗)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 (1861∼1939)가 살던 집이다.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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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옥은 처음에는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복원당시 안채만 남고 모두 없어졌던 것을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사랑채와 별당채를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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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 ') 자형 몸채에 'ㅡ'형 행랑간이 붙어 ' ' 형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안방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형(中部地方形)으로 서울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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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한 기단(基壇), 칠량가(七樑架)의 가구(架構), 6칸 크기의 부엌 등에서 대가(大家)의 면모를 느낄 수 있으며, 파련각(波蓮刻)한 보아지와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사용하고, 마루밑 고막이 벽에 투공문양(透孔紋樣) 벽돌을 사용하여 환기공(換氣孔)을 설치한 점 등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것들이다 |
조선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하여 경복궁(景福宮)이 중건(重建)될 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2-6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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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우물


부마도위 박영효가옥
서울 팔대가(八大家) 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이 가옥은 조선 제25대 철종(哲宗)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 (1861∼1939)가 살던 집이다.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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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옥은 처음에는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복원당시 안채만 남고 모두 없어졌던 것을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사랑채와 별당채를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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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 ') 자형 몸채에 'ㅡ'형 행랑간이 붙어 ' ' 형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안방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형(中部地方形)으로 서울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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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한 기단(基壇), 칠량가(七樑架)의 가구(架構), 6칸 크기의 부엌 등에서 대가(大家)의 면모를 느낄 수 있으며, 파련각(波蓮刻)한 보아지와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사용하고, 마루밑 고막이 벽에 투공문양(透孔紋樣) 벽돌을 사용하여 환기공(換氣孔)을 설치한 점 등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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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위장 김춘영가옥
이 가옥은 조선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이다.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다.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 ')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대청은 오량가(五樑架)이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삼량가(三樑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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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平民住宅)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하여 화방벽(火防壁)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적이다. |




해풍 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이 가옥은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의 장인(丈人)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동궁(東宮)의 계비(繼妃)로 책봉(冊封)(1906)되어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한다.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및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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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元(원)'자 모양인데 제일 윗터에 사당(祠堂)을 배치하고 그 아랫터에는 몸채를 두었다. 사당은 1960년 4·19 혁명 때 불에 타서 없어졌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사당 앞에 두 단의 석축(石築)을 쌓아 화계(花階)를 구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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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채는 일고주오량가(一高柱五樑架)이고 앞채는 삼량가(三樑架)이다.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과 방형초석(方形礎石), 그리고 일부에는 굴도리를 사용하여 집의 격식(格式)을 높였다.



김장독을 보관하는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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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 윤씨친가
이 가옥은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의 황후(皇后)인 윤씨가 열세 살에 동궁(東宮)의 계비(繼妃)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는 집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윤씨가 황후가 된 이후인 1910년대 부원군(府院君)의 궁(宮) 집으로 새롭게 중건(重建)된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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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집은 종로구 옥인동 47-133번지에 있는데, 집이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이곳에 복원(復元)하였다. 집의 평면은 'ㄷ'자형 몸채 앞쪽에 사랑채를 두어 전체 평면은 'ㅁ'자형이다. 몸채와 사랑채 쪽은 지붕에 단차이(段差異)를 두었고, 사랑채 대청 부분은 바깥에서 볼 때 중층(重層)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것은 지형(地形)을 살린 구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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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석 기단(長臺石基壇), 방형초석(方形礎石), 초익공(初翼工), 운공(雲工)을 사용한 점, 후면과 측면 툇마루 바깥쪽으로 설치한 정자(井子) 살창,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된 점 등에서 최상류층의 저택임을 알 수 있으며, 언뜻 보면 별궁(別宮)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가마

전통찻집

정자에서 국악당의 모습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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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위의 비둘기 떼
서울천년 타임 캡슐광장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캡슐에 담아 400년 후인 서울 정도 1000년에 후손에게 문화유산으로 전하고자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