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9, 6, 5 (금)
날씨: 맑음
무봉사를 뒤로하고 재약산 밑에 있는 표충사로 향한다. 삼국으로 나누어진 민족을 한국가로 통합할 수 있다는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고,
병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치유할 수 있는 약과 의술을 주고, 외적의 침입으로 위협받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 외침을 막을 수 있는
호국정신을 심어주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인재들을 기르기 위해 교육한 영산 명찰이 있다.
표충사를 품고 있는 재약산(載藥山)이 바로 그 영산이며, 표충사가 명찰이다. 재약산은 신라시대때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연마했던 수련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훈련시켜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본산이다. 또한 한국 최고의 명의 허준에게 스승인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며 더욱 깊은 의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표충사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서원을 건립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여 경내에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서원이 있는 것이 바로 표충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약산이라는 이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영정약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신라 흥덕왕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표충사의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정약수는 아직도 표충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해소해주는 감로수로서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 표충사는 죽림사로 불렀으며, 흥덕왕때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부르다가, 조선 헌종 때 청허 사명
기허 대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오면서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려 미리 알려주고 있다고 하며 갑오경장을 비롯 한일합방,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전에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하였다고 한다.
표충사 입구의 홍제교
일주문
수충루
표충사의 중문격인 수충루는 중층 건물로 누각 아래에 문을 설치하여 진입공간을 마련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최근에 건립되었다. 누각의 중앙 칸에는 ‘표충사(表忠寺)’ 편액을 걸고, 좌우 칸에는 호국성사의 충혼을 상징하는‘수충루(酬忠樓)’ㆍ
‘천황제일루(天皇第一樓)’라는 편액을 걸고 있다.
수충루를 지나며 본 경관. 유물관이 크게 보이고 우측에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유물관
근래에 새롭게 건립된 유물관은 국보 제75호인 표충사금동함은향완을 비롯하여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및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유품 중에는 그가 입었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을 비롯해 평소에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패도(佩刀)와 여러 종류의 사령문서들도 고스란히 남아 전시되고 있으며, 이 중 많은 수의 유물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표충사. 유물관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표충사는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표충서원
표충사 앞에 유물관과 마주하여 자리잡은 표충서원은 표충사와 함께 최근에 건립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모제가 있을 때에 사용되는 장소이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중당
표충사와 맞은편에 위치한 의중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법회를 열어
그 정신을 전승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의중당’이란 편액 외에 ‘무설전(無說殿)’ㆍ‘설법전(說法殿)’ㆍ‘대흥불법도량(大興佛法道場)’의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내부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사천왕문과 사천왕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현대의 불모(佛母)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만일루
경내 서북편에 있는 만일루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1860년(철종 11)에 월암선사가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의 전각을 세워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무량수각(無量壽閣) 또는 서래각(西來閣)이라 하였다.
이 전각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여 정진하던 곳으로 1926년 큰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하고 수행과 자비교화로써 일생을 보낸 효봉대종사가 말년을 보내다 1963년 이곳에서 열반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되었으며,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함께 건물이 건립된 그 이듬해인 1861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 걸고 있는 ‘서래각’ㆍ‘무량수각’ 등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84)의
글씨이다. 만일루는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방형의 삼층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탑의 기단이 단층인 점과 상륜부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기단은 2단으로 된 6매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5매의 면석을 세우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갑석(甲石)을 짠 단층기단이며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있어 각 면을 둘로 구분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체 부분인 옥신(屋身)과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옥신이 다소 큰 느낌이 있다. 옥신에는 매우 넓은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아무런 조식을 더하지 않았으며
옥개석은 비교적 얇은 편으로 밑에 4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다. 또한 각 층의 옥개석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風鐸)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상륜부는 밑에서부터 노반(露盤)ㆍ복발(覆鉢)ㆍ앙화(仰花)ㆍ보륜(寶輪)ㆍ수연(水煙) 등을 차례로 올리고 그 위에 찰주(擦柱)를
세웠는데 이 부재들 중에는 후대에 보충된 것도 섞여 있는 듯 하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과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인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탑 앞에 놓인 석등 또한 이와 비슷한 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최근 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불상들이 출토되었으며 이 불상들은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제문
대홍원전
대홍원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대홍원전은 일반인들을 위한 시민선방이다.
내부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후불탱은 1882년(고종 19)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다.
영각
대광전 북서쪽 만일루 옆에 위치한 영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함께 표충사를 빛낸 역대 조사스님들과 중창주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영정은 모두 22점으로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어 있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영정과 함께 모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정약수
범종루
대광전과 맞은편에 우화루와 나란히 범종루가 위치해 있다.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1층에는
‘구국충혼대성종(救國忠魂大聖鍾)’이라 부르는 범종을 중앙에 걸고, 2층에는 운판ㆍ법고ㆍ목어를 걸어 놓아 불전사물을 모두
봉안하고 있다.
우화루
우화루 내부 전경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대광전
표충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전은 조선후기에 건립되었으나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된 것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바르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활주를 세워놓았다. 공포는 내4출목(內四出目)ㆍ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식이며, 문칸은 정면 5칸 모두가 빗살문으로 가운데 3칸은
사분합의 문을, 양쪽 2칸에는 이분합의 문을 달았는데, 들어올려 차양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뒷면 5칸이 모두 벽이 아닌 창호로 마감된 점이 이채로우며, 측면 벽에 그린 그림 가운데 깊은 산속을 자동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1929년에 대광전을 중건하면서 당시 풍속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대광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 조각과
잘 다듬어진 주초석 및 추녀마루의 잡상과 기둥 위의 용머리 장식도 눈길을 끈다.
대광전의 창살과 돌계단
대광전 내부
아미타후불탱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전이 보인다.
신중탱
내부에는 전각의 명칭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야 하는데, 석가ㆍ약사ㆍ아미타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세불은 모두 목불(木佛)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고 허리가 짧아 매우 근엄하게 보이며, 17세기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중에 전하는 바로는 대광전이 중건될 때 사천의 도솔암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삼세불상 뒤의 후불탱은 1930년에 조성된 송파정순(松坡淨順)ㆍ예운상규(禮雲尙奎) 스님의 작품으로 부처님 주위에
보살ㆍ나한ㆍ천왕 등 권속이 옹위하고 머리 위로는 무수한 화불(化佛)들이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신중단에 걸려 있는 신중탱 역시 이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퇴운일섭(退耘日燮) 스님이 그린 것이다.
법당의 동쪽 벽에는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아미타여래가 관음ㆍ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천상에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다. 화기에는 금어(金魚) 기전(琪銓) 스님에 의해 1885년(고종 22년) 6월 해인사 대웅전에서 조성하여 재약산
표충사 내원암에 봉안하였다고 적혀 있다. 대광전은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상전
팔상전 내부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성전, 산령각
독성전,산령각 내부
대광전과 팔상전 뒤에 위치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아담한 규모이다. 전면 두 칸에는 ‘독성전’과 ‘산신각’을 각각
편액하고 있으며, 법당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된 석조나반존자상과 독성탱ㆍ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관음전
42수 관음보살상
대광전의 동쪽에 명부전과 나란히 자리잡은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40년에 건립되었다.
최근까지도 대광전과 인접한 거리에 명부전과 자리를 바꾸어 위치하고 있었으나 가람을 정비하면서 뒤로 물러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내부에는 최근에 금동으로 조성한 42수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좌우 보처로는 목조 남순동자상(南巡童子)과 용왕상(龍王像)이 있다.
후불탱화로는 천수천안관음보살탱(千手千眼觀音菩薩幀)을 봉안하였는데, 이 탱화는 대광전의 탱화들과 함께 1930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응문성(普應文性)ㆍ상순(尙順) 스님의 작품이다.
명부전
명부전 내부
대광전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좌측의 평평한 대지 위에 관음전과 나란히 자리잡은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 사찰의 중창과 함께 중건되었으며, 다시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가 1681년(숙종 7)에 중건되었다. 이후 1839년에 표충사를 옮겨오면서 서산ㆍ사명ㆍ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바뀌었다가 1857년(철종 8)에 새롭게 중건되었다. 1926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2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9년에 중수한 것이다.
법당의 내부에는 불단 중앙에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본존으로 석조도명존자입상과 무독귀왕입상이 협시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석조시왕상과 기타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상 뒤로는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1858년에 성주(聖注)ㆍ정화(定煥)ㆍ
덕운(德芸)ㆍ관행(寬行)ㆍ오연(悟演)스님 등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명부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노전
찻집과 매점
해 질 무렵의 사천왕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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