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실상사
2012,11,20(화)
맑음
지역으로 구분하여 사찰탐방을 하면서도 지리산 부근의 사찰들은 제외했었다.
지리산을 한바퀴 돌며 한꺼번에 탐방을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미뤄졌던 계획을 기회가 생겨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달려 실상사 입구에 도착하니 1시가 되어간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해탈교를 지나며 왼쪽에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엔 눈이 내려 흰모자를 쓰고 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유서깊은 사찰이다. 선종(禪宗)이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 대이지만 발전을 보지 못하다가
도의국가(道義國師)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수학하고 돌아온 홍척스님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최초 사찰로 개창하게 된 것이다.
홍척스님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ㆍ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이 종산(宗山)을 더욱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스님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1690년(숙종 16)에 이르러 침허대사(枕虛大師)가 300여 명의 스님들과 함께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36동의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실상사는 1700년(숙종 26) 침허조사에 의해 중창 당시의 규모를 살펴볼 때 매우 웅장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건물로는 대적광전, 약사전, 무생전, 십불전, 오백전, 장육전, 원통전, 미타전, 적묵전, 미륵전, 명부전, 만화당,
현묘당, 청심당, 보응당, 자운당, 탐진당, 정성당, 금당, 향로각, 대동고, 환재각, 종각, 향적소, 만세루, 능허각, 불이문,
천왕문, 해탈문, 조계문 등이 있었다.
이러한 많은 전각과 누각이 1883년(고종 20) 스님들을 몰아내고 실상사의 너른 땅을 차지하려 했던
양재묵 일당의 방화로 인해 대부분 불타고 요사 1채와 전각 3동만이 남았다.
그때 불탄 대적광전은 단층 건물로는 조선에서 제일이라고 부르던 건물이었다 한다.
웅장했던 실상사 규모를 보여주는 한 예로서 목탑지를 들 수 있다.
실상사 목탑지는 천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규모는 경주 황룡사지의 9층탑지보다 조금 작았던 듯하다.
건물지의 위치와 심초석이 안치된 방법, 자연석인 초석 등을 종합해보면 원래의 가람과는 별도로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장육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해탈교
중앙에 보이는 천왕봉
해탈교를 지나면 석장승이 반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의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초입에는 해탈교를 전후하여 모두 3기의 장승이 서 있다. 먼저 해탈교를 건너기 직전에 석장승 하나가 있는데
원래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승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나 1963년 홍수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큼직하게 보이는 해탈교 가설공덕비
천왕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9년에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천왕문(天王門) 편액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나무로 조성된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의 사천왕상
기념품 매점
옛기와탑
실상사 목탑지
삼층석탑 보물 제 37 호
동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두 탑의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가 있으며, 높이는 8.4m이다.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면의 받침은 4단이며
살짝 위로 들려진 네 귀퉁이는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보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 보물 제 35 호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등으로 높이가 5m나 된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 모양 조각을 얹었으며,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 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광전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4년(고종 21)에 월송(月松) 스님이
본래의 넓은 금당 터 기단 위에 다시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보광전 주변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본래의 금당이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광전 삼존불
건물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상과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ㆍ산신탱과 전북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실상사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상 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ㆍ대세지 두 보살입상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도 한다.
좌우의 보살입상은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紙佛)로 보살상 1구가 과거 분실되어 남은 1구를 대칭적으로 복원하여 모신 것이다.
범종각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1991년에 건립한 것이다. 종각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지리산실상사호국범종(智異山實相寺護國梵鐘)’이 걸려 있다. 1967년 실상사에서 파손된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을 발견하였는데, 현재 범종각이 서 있는 자리가 그곳이다. 파손된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범종각에 봉안된 범종은 이 종을 모델로 하여 새로 조성한 것이다. 명부전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 것을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ㆍ판관상ㆍ인왕상의 명부 권속이 봉안되어 있고,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 41 호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긴 편이며, 목의 삼도(三道)는 겨우 보일 듯이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감 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무릎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손도 최근에 찾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붙였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이 불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현재 보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지를 지나면 극락전이 보인다.
극락전 증각대사 응요탑비 보물 제 39 호 이 탑비는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모이며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 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684년(숙종 10) 계오대사(戒悟大師)에 의해 부도전으로 지은 것이다. 1788년(정조 12)에 금파 관오대사(錦波寬旿大師)가 중수하였고 이후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奇峰)ㆍ처윤(處允) 스님과 함께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보물 제 33 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보물 제 34 호 수철화상(秀澈和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으며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楞伽寶月塔碑)’라는 전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전체 높이는 약 3m이며 현재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각대사응요탑 보물 제 38 호 실상사의 개창조인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가 증각(證覺)이고 부도 이름이 응료(應蓼)여서 ’증각대사응료탑‘으로 불린다. 8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아 기단(基壇)을 조성한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위 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비교적 낮은 편이며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을 새겼으며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2.42m이다. 현재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성각 칠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32년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세운 것이다. 정면에는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의 글씨로 ‘칠성각’ 편액을 달았으며 내부에는 1981년에 조성한 칠성탱을 봉안하였다. 요사채 부도전 (사진은 4년전 남편이 찍은 사진 사용 ) 편운화상탑 실상사의 대표적인 부도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ㆍ증각대사응료탑ㆍ실상사부도 등인데 이 외에도 많은 스님들의 부도가 흩어져 있다. 먼저 실상사에서 약수암으로 가는 길목 옛 조계암 터에는 편운화상탑(片雲和尙塔)ㆍ청련사사리탑(靑蓮士舍利塔)ㆍ 용운화상탑(龍雲和尙塔) 등 4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편운화상 부도는 구름과 용이 조각된 원형의 하대에 주발을 올려놓은 듯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신 정면에는 ‘창조홍척제자안봉창조편운화상부도(創祖洪陟弟子安峰創祖片雲和尙浮圖)’와 그 아래에 ‘정개십년경오세건(正開十年庚午歲建)’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라는 연호가 어느 시기의 연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편운화상이 홍척국사의 제자이고, 수철화상과 같은 시대 인물인 것으로 미루어 그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보물 36호인 실상사부도 주변에도 자운대화상탑(慈雲大和尙塔)과 회명당대선사탑(晦明堂大禪師塔)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 소나무 숲속에는 용담대화상탑(龍潭大和尙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