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7. 13.
휴일이어서 여주에 있는 사찰을 가기로 했는데 간밤에 비가 엄청 쏟아진다.
아침에까지 비가 쏟아지면 다음으로 미루려 했는데 다행히도 비가 그쳐 계획대로 여주로 향한다.
첫번째로 간곳은 여주의 신륵사..
오래전에 왔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왔던것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나 하나 둘러본다. 간밤에 내렸던 비가 낮에 햇볕의 온도로 습하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사우나에서 방금 나온 사람처럼 얼굴에 땀이 비오듯이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가족들이 나들이 온
모습도 눈에 띄이고 극락보전에는 오늘도 불자들이 열심히 불공들을 들이는 모습이 아름답다.
일주문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범종각
법고
범종
관음전
명부전
향나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빼어난 수형을 자랑한다. 신륵사와 역사를 같이한 희귀 수목으로 1982년 10월 15일 신륵사 은행나무와 함께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500년이고, 나무 높이 5m·나무 둘레 1.3m·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25㎡이다.
조사당
보물 제180호. 정면(正面) 1칸, 측면(側面)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당우(堂宇). 낮은 석단(石壇) 위에 남향으로 세웠으며,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다. 전면(前面)은 6짝의 띠살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게 만들었다. 나머지 3면에는 벽을 쳤는데 측면의 앞칸만은 외짝의 정자(井字) 살문을 달아 따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이 건물의 특색은 전후면을 각각 1칸씩으로 처리하여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를 볼 수 없는 점이다.
공포(栱包)는 안팎을 모두 이출목(二出目)으로 하여 전후면에는 공간포(空間包)를 4개씩, 측면의 기둥 사이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이 쇠서들을 다듬은 조각적 수법에는 조선 초기의 다포(多包)집 계통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륵사는 조선 예종(睿宗) 때 중수(重修)되었다고 하므로 조사당은 그 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으며, 불단(佛壇) 뒷벽 중앙에 나옹(懶翁)과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학(無學)의 영정이 걸려 있다.
석종비, 석종, 석등이 있는곳... 올라가는 계단..
석종비
보물 제229호.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대(碑臺)와 옥개(屋蓋)는 화강석이다. 비표(碑表)는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驪興郡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로 시작되는 석종기와 ‘보제존자 진당시 병서(普濟尊者眞堂詩幷序)’로 시작되는 진당시로 양분되어 있고, 이면(裏面)에는 수월사(水月寺) ·보광사(普光寺) 주지를 비롯하여 석수(石手) ·목수(木手)에 이르기까지 약 200명이 열기되어 있다.
서자(書者)는 한수(韓脩)이며, 이 비의 서체가 안노공풍(顔魯公風)의 해서임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전체의 조형은 이 절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와 같으나 대석이 1단의 앙련대(仰蓮臺)를 가졌으며, 개석(蓋石)에 옥개부 공포(屋蓋部 栱包)와 와구(瓦溝)가 조출(彫出)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정제(整齊)되어 있다. 대장각기비보다는 불과 4년 앞서는 것이다.
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m.
화강석으로 제작된 이 석종은 먼저 지상에 석축(石築)으로 넓은 건축기단(建築基壇)을 축조하고 상면 외주(上面外周)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돌려 갑석(甲石)을 삼고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이 기단 상면에는 박석(薄石)을 깔고 그 중앙에 2매의 판석(板石)을 얹어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을 마련하였으며, 탄신과 접하는 곳에는 원형 몰딩이 조각되었다. 탑신은 원래의 종형(鐘形)에서 퇴화되어 위가 잘라진 포탄같이 되어 있으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고 탑신의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 꼭대기에는 화염무늬[火焰文]를 모각(模刻)한 낮은 보주(寶珠)가 얹혀 있을 뿐이다.
이 석종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 후면에 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석종형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팔각문당형(八角門堂形)의 부도형식(浮屠形式)이 고려시대에 일부 새로운 양식으로 가미되었다가 그 말엽에 이르러 완전히 바뀌어 전혀 새로운 형식이 된 것인데, 이 석종은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혜근(慧勤)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석등
보물 제231호. 총 높이 194cm, 화사석(火舍石) 높이 66cm.
신륵사 서북쪽 언덕에 있는 혜근(慧勤)의 묘탑(墓塔)을 장식한 석등으로, 기본형은 8각이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화사석과 옥개(屋蓋)를 얹고 맨 꼭대기에 보주(寶珠)를 놓은 구조이다. 지대석(地臺石)의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며 하대(下臺)에는 겹잎의 복판연화(複瓣蓮華)무늬가 돌려져 있다. 간석(竿石)은 연주(連珠) 기둥의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고 그 안에 꽃잎을 새겨 넣었다. 상대석(上臺石)은 겹잎 16판의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새겼으며 판단부(瓣端部)에는 2단의 굄띠를 각출(刻出)하였다. 화사석은 8각에 각각 원주(圓柱)를 조각하고 그 원주에는 반룡(蟠龍)을 양각(陽刻)하였으며 각 면(面)에는 사라센 계통의 완곡선(緩曲線)을 그린 통창(通窓)이 있다.
이 석등은 화사석 외에는 화강석재이므로 각 부분의 조식이 완전하나 화사는 연질(軟質)이어서 다소 마손(磨損)되어 있다.
극락보전
1985년 6월 28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극락보전은 1678년(숙종 4) 중건된 이후 1797년(정조 21)에 중수되기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장대석의 3벌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 위에는 추녀를 받치고 있는 4개의 활주가 있다. 공포는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내4출목(內四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으로 주간(柱間)에는 2개씩의 공간포(空間包)를 짰다. 전면 공포에는 쇠서 끝에 연봉이 장식되어 있으나 후면 공포의 쇠서는 연봉이 없는 단순한 형태로 17세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중앙 뒤편에 불단(佛壇)을 놓아 나무로 만들어진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봉안하였는데 1977년에 다시 금칠하였다. 불화로는 1900년에 조성된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의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1773년에 주조한 범종에는 조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짜고 천장은 우물반자를 하였다.
극락보전 정문 바로 위에는 특이한 현판이 있다. 글씨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되어 있는데, 나옹 화상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이 현판은 이상하게도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서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여 특이함을 나타내는 흥미로운 현판이다.
이 불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는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가구(架構)의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 양식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높이 약 3 m.
흰 대리석으로 건조된 이 석탑은 기단(基壇)에서 탑신부(塔身部)에 이르기까지 각층이 모두 한 장씩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에서 지대(地臺) 상면에는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의 중석(中石)은 매우 얇고 갑석(甲石)은 특별히 두껍게 되어 있다. 그 중앙에 일조대(一條帶)를 돌리고 다시 밑에는 일단의 받침이 있고 상면에도 일단의 괴임이 있어 상층을 받게 하였다. 또한 탑신부는 상층에서 상실된 부재(部材)가 있는 듯하나 8층 탑신 이하는 원형대로 남아 있는데 각층의 감축률이 적은 편이고 옥신(屋身)은 매우 낮아서 그 두께가 옥개석(屋蓋石)의 두께와 비등하다. 그리고 현재 8층 옥신 위에는 이 옥신 크기 만한 옥개석과, 이보다 훨씬 작은 옥신의 부재가 각각 하나씩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더 많은 층급(層級)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일부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남기면서 여기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리석에서 오는 질감(質感)으로 인하여 각부(各部)의 조루(雕鏤)는 일층 아윤(雅潤)한 맛을 더하고 있으며, 한편 그 형태가 방형(方形)으로서 2층 기단 위에 층급을 중적(重積)한 점은 신라나 고려시대 석탑의 기본 수법을 따랐으나, 세부 조형에서는 전혀 감각을 달리하는 석탑이다.
칠성각
김병익공덕비
구룡루
대장각기비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높이 약 9.4m.
이 탑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축조되었으며, 기단 부분은 화강석으로, 탑신부(塔身部)는 벽돌로 이루어졌다. 그 구조는 일반 석탑의 기단과 유사한 2중의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고, 그 위에 탑신을 구축하여 6층까지 있으나 그 위에 다시 밑단이 있어 7층같이도 보이는 매우 애매한 형태이며 축조형식도 신라시대의 전탑과는 달리 옥신(屋身)에 비해 옥개(屋蓋)가 매우 평박(平薄)하여 전체에서 오는 인상이 많이 다르다. 또한 옥개 받침은 3층까지 2단이고 4층 이상은 1단이며 상면의 받침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식으로 되어 이례적인 형태이다. 한편 벽돌의 일부에 문양(文樣)이 양각(陽刻)되어 있는 바, 간극(間隙)을 둔 2중 반원(半圓) 사이에 연주(聯珠)와 반원 내에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형식으로서 이러한 형식이 신라의 범종문양(梵鐘文樣)에서 볼 수는 있지만 그 수법이 신라의 그것과 같지 않다.
이와 같이 전체의 형태가 이례적이고, 벽돌의 반원 모양의 배열도 무질서한 것은 후세의 무지한 수리로 인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탑 북측에 있는 수리비(修理碑)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강월헌
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