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8. 01.
갑사의 대웅전에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한참 기도중이다.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신도들이 각각 편한곳에서 스님에 기도소리에
귀를 귀울여 다같이 한참 기도중이다.
나라 안의 으뜸 가는 사찰이라 하여 갑사라 했다는 이절은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 연천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서 1.2키로미터 정도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갑사가 있다
해탈문을 넘어 경내에 첫발을 들여놓으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처마 밑에 계룡갑사 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갑사 강당이다.
강당 양 옆에 엘자 모양의 적목당과 진해당이 놓여 있고 강당 안쪽 맞은편으로는 대웅전이 높은 축대위에 올라 앉아 있다.
그리고 대응전 양쪽으로 응향각과 삼성각이 있고 해탈문 바로 옆에 종각이 있다
종각 안은 눈여겨봐야 한다 보물 제478호인 동종이 보존 음통이 없고 종 머리 부분에 용두 마리가 고리를 만들고 있는 등 전형적안 조선시전형적인 조선시대 종의 특징을 보일뿐만 아니라 몸체에 1584년(선조 17년)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 동종 양식을 대표한다.
구리 8000근으로 만들었다는 이 종은 일제시대에 공출당했다가 광복 후 인천에서 �아온 것이다.
갑사의 진짜 볼거리들은 여기서 좀 혹은 제법 떨어진 곳에 앉아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다.
먼저 경내에서 왼쪽으로 조금 언덕진 곡에 자리잡은 표충원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휴정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738년 (영조14년)에 세운 건물 이다.
해탈문을 빠져나와 발걸음을 산 정상 쪽으로 돌려 100미터 정도 오르면 자연석으로 형성된 돔이 있고 그 안에 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다. 왼쪽에 약호를 들고 있는 이 입상은 백제 양식의 우수한 작품으로 원래는 갑사 뒷산 중사자암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다.
약사여래 건너편에 스산하게 앉아 있는 검물은 조선 말기 세도가인 윤덕영의 별장이다.
한일합방 당시 순종과 순정황후를 위협하여 옥새를 강탈 강제 조인케 한 윤덕영에게 공주 갑부 홍원표가 당시 돈 4만 원을 들여 지어준 것인데 갑사로부터 30년 임대 계약을 맺고 갑사 계곡의 암반 위에 건물을 세운 뒤 약사여래입상과 공우탑을 별장 주위로 옮겨 놓았다.
삼층석탑인 공우탑은 별장 앞쪽에 자리잡고 있다 갑사 중건시 큰 도움을 준 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 대적전 앞마당에 놓여 있는 이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기법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물 제2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부도와 동종 및 월인석보판본에 이어 갑사의 네 번째 보물인 철당간 지주는 오솔길을 따라 좀더 입구 쪽으로 내려간 골짜기에 놓여 있다. 본래는 28개의 철통이 이어져 있었는데 1893년에 벼락을 맞아 4개가 부러져 나가고 지금은 지름 50센티미터 굵기의 철통 24개가 연결되어 그 높이가 15미터에 이른다 보물 제256호이다.
오랜 역사와 번창한 사세를 자랑하던 갑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영규대사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부 소실 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였고 1654년과 1899년 크게 중수하였다그러므로 지금의 절집은 조선시대중 후반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현재 갑사는 수덕사의 말사이며 부속 암자로는 내원암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이있다.
갑사 경내에서 등산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용문폭포와 천진보탑 은선폭포 남매탑 등 볼거리들이 줄줄이 이어져 등산객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갑사에서 연천봉 은선대를 지나 동학사로 이어지는 등산길이나 신원사에서 연천봉 갑사로 이어지는 길 모두추천할 만한 등산 코스다.
일주문
철당간 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갑사(甲寺)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네 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基壇) 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인데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30년(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사천왕문과는 반대쪽에 철당간지주가 있어 먼저 둘러본다.
사천왕문
계룡갑사
범종루
대웅전
팔상전
삼성각
갑사부도
갑사 뒷편 계룡산에 쓰려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높직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윗층은 차츰 줄어들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새겨 놓았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 몸돌은 4면에 문모양과 그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는 등 지붕모양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후에 새로 만든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나,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졌다.
특히 지붕돌이 지나치게 작아져 전체적인 안정감과 균형을 잃고 있다.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부도탑들 중에서도 우수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갑사 대적전 (지방유형제106호)
대적전에서 대웅전으로 가는길에 탑이 있다.
전통찻집이 보인다.
갑사 동종
갑사 사적비 (지방유형제52호)
갑사의 창건과정과 역사를 적은 비로, 바윗돌 위에 사각의 비받침돌을 마련하여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에는 4면 모두 비문을 새겼는데 일부 손상된 부분은 읽을 수가 없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재(碑石材)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조선 현종 원년(1659)에 세운 비로, 비문은 여주 목사 이지천이 짓고 공주목사 이기징이 글씨를 썼다.
일주문으로 들어가기 전 매표소 오른쪽에서 연꽃축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