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6. 07.
도갑사 주변에 식당은 많았으나 문을 연 식당이 없어서 도갑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위사가 있어 무위사를
향해 떠난다.
무위사 입구에는 식당은 전혀없고 차만을 판매하는 찻집만이 있었고, 일주문을 신축하고 있었으며 ,주변은 공사를
많이 하고 있었다.
대웅전은 없었고 대신 극락보전이 있었으며 극락보전에는 노스님이 기도를 하고 계셨다.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찰을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며 특히 산신각에 어린 딸까지 절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젊은 대학생들의 사찰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일주문
천왕문
범종각
범종
삼층석탑
선각대사 편광탑비
나한전
산신각
천불전
극락보전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공포는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조각의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을 완성하였을 때 한 노인이 찾아와 49일간 안을 들여다 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안으로 들어간 뒤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49일이 되던 날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몰래 들여다 보자, 그 안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림을 그리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균형있는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뛰어난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샘물
2001년 7월 30일 보물 제1313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의 주존불인 아미타불상의 뒤에 그려진 후불벽화로, 무위사 극락전(국보 13)에 별도로 세워진 토벽(土壁)에 그려져 있다.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 명의 시주로 대선사 해련(海連) 등이 1476년(성종 7)에 조성하였다. 4각의 연화대좌(蓮花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관세음보살이, 오른쪽에서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아미타 삼존도(三尊圖)이다.
일반적인 고려불화의 구도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며, 16세기 이후에는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두 협시불의 키가 부처의 어깨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 양쪽에 각각 세 비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아미타불의 광배는 원형이나 배[舟] 모양도 아닌, 어깨 위가 잘록한 키[箕]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는 15세기 이후의 경향이다. 화면 위 양쪽에 상체만 그려져 있는 6비구는 얼굴 표정과 자세가 다양하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 입상은 두광이 녹색의 원형이고 신광은 황색의 타원형이다. 화려한 보관 겉으로 흰색의 투명한 망사가 덮여 있고 끝자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데 가는 선만으로 무늬를 그려 질감이 투명하다.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석장과 보주를 지닌 채 흰 사리를 걸치고 점 무늬가 투명한 두건과 줄무늬 천의(天衣)를 입고 있어 고려불화의 기법이 엿보인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표현된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인데, 고려 말에 성했던 지장신앙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색채는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을 사용하여 고려불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는 반면 전체 구도와 광배, 부처의 머리 모양 등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불단 위에 봉안된 좌상의 삼존형식과도 일치되고 있어 15세기 이 지방의 불교신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호화롭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시대 초기의 새로운 수법으로 그려진 걸작으로 꼽힌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와 법당에 그림을 그리겠다면서 49일 동안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법당에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잠근 뒤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하루는 궁금증을 못 이긴 주지가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았다고 한다. 법당 안에서는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주지가 들여다보는 바람에 관세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