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9, 6, 6 (토)
날씨 : 맑음
용화사를 출발하여 양산을 경유하여 지경고개를 넘어 부산의 범어사로 향한다.
범어사(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金井山)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다.
범어사 일주문 가운데 어칸에는 ‘조계문(曹溪門)’이라는 편액과 좌우 협칸에는 ‘금정산범어사
(金井山梵漁寺)’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이 현판으로 이해한다면
범어사는 교종사찰인 아닌 선종사찰 이다.
그러나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의 하나인데, 언제부터 선종사찰이 되었을까.
1910년 한국불교 선종 수사찰로 인정받은 범어사는 1913년 선찰 대본산으로 확정 되었다.
선찰대본산으로 사격을 가진 범어사의 선사상 운동은 경허스님으로 부터 시작된다.
1900년 선원을 개설한 스님은 수선결사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선수행 풍토를 조성하였다.
뒤를 이른 성월스님은 범어사 각 암자에 선원과 선회를 창설하여 많은 선승들을 배출하고 양성하였다.
당시 선불교를 주창한 경허 용성 성월 동산스님들은 선불교 운동을 통하여 사상적 신앙적으로 피폐된
불교계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선불교 운동은 당시 봉건질서 타파와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항일운동으로 연결 되었다. 일본의 한국불교 강제 통합에 대해 전통한국불교를
수호하고 나아가 근대불교를 지향하는 발판이 되었다.
범어사 선승들은 선학원과 선우공제회 창립 때 주도적 역할을 맡으면서 선불교 중흥을 꾀하면서 일본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에 대응해왔다. 뿐만아니라 해동중고 근정중학교 등 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니 각 지역에 포교당을 설치하여 불교진흥운동과 근대교육 및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3․1 운동 때는 이곳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이 ‘범어사 학림의거’라는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전국에서 쓸
태극기를 범어사 암자에서 만들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이후 범어사에서 배출한 선지식들은 일본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통을 세우기 위해
정화운동을 이끌어온 주역을 담당했다.
일주문인 조계문 보물 제 1461 호
조계문은 곧 일주문 역할도 하는데, 1614년(광해군 6) 묘전 스님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처음 지었고, 그 뒤 1718년(숙종 44)에 명흡(明洽) 스님이 주관하고 대준(大俊)·우화(祐和)·처운(處雲) 스님 등이 편수가 되어 기둥을 석주(石柱)로 고쳤다. 이 조계문은 다시 1781년(정조 5)에 백암(白巖) 스님이 중건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기둥 사이의 세 개의 문에는 중앙에 '조계문(曹溪門)', 오른쪽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그리고 왼쪽에 '금정산 범어사(金井山梵魚寺)'라는 현판을 걸었다. 조선 시대 중기 다포식 가구의 전형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보물 제1461 호로 지정되었다.
천왕문과 사천왕
조계문을 지나 13단의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축대 위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한 사천왕문이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1699년(숙종 25)에 자수 스님이 처음 건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최근에 새롭게 단장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다. 좌우의 협칸에는 짓궂은 표정으로 각각 비파와 칼·여의주·탑을 들고 서 있는 사천왕상 4위를 봉안하였고, 중앙은 통로이다. 네 기둥에는 사천왕을 공경하는 내용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동산(東山) 스님이 짓고 쓴 것이다.
불이문
불이문 천장
불이문은 1699년(숙종 25)에 자수 스님이 천왕문과 함께 창건한 이래 중수의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작은 규모로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원통형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내 외 2출목의 주심포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 기둥에는 동산 스님이 쓴 주련을 걸었다. '신광(神光)의 밝고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세상의 알음알이를 논하지 말라.'는 경구(警句)가 있다.
범어사 편액과 전경
괘불대
미륵전 앞에 있는 괘불대는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야외법회 때 괘불을 걸기 위한 지지대이다.
모양은 당간지주처럼 두 개의 석조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 구멍을 뚫어 줄을 묶도록 하였다.
괘불 지지대의 높이로 보아서 괘불의 규모도 짐작이 가능하다.
종루
보제루 북쪽에 종루(鍾樓)가 있다. 아침저녁에 거행하는 예불이나 의식에 사용하는 사물(四物), 곧 범종(梵鍾)·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를 봉안한 2층의 누각 건물이다. 이 종루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69년(숙종 25) 명학 스님이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당시의 종루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삼층석탑 맞은편에 있었다. 1910년대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구조는 2층의 누각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규모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전에는 1층이 개방된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기둥사이를 막아 문을 가설하여 기념품 판매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륵전과 목조미륵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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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彌勒殿)은 종루 앞,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안에는 목조 미륵불좌상을 독존으로 봉안하였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미륵전에 4위의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서·남·북쪽의 3위는 석조였고, 동쪽의 1위만 목조였다. 석조 미륵은 모두 없어졌으나 목조 미륵불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미륵불은 특이하게 정면, 곧 입구의 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벽을 등지고 대웅전을 향해 앉아 있다. 이는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미륵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고, 이 때문에 일본을 등지고 있다고 한다.
범어사 삼층석탑 보물 제 250 호
미륵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되었다. 높이는 약 4m이고, 상하의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하층기단은 각 면에 세 개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탱주는 없다. 상층기단은 중석(中石)을 높게 하고 각 면석에 역시 안상을 크게 조각하였다.
1층 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옥개석은 급격한 경사를 지녔고, 끝에서 살짝 위로 솟았다. 옥개받침은 4단인데 평평하고 얇아 신라시대 하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상륜부는 사라졌으나 후대에 노반과 보주를 얹어 놓았다. 한편 기단 아래에는 조성 당시에는 없었던 석단을 추가하여 석탑을 높였으나, 그로 인해 안정감이 부족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 후기 9세기의 석탑 양식을 잘 지니고 있어 보물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과 목조비로자나 삼존불좌상
미륵전과 함께 중단구역의 중심을 이루는 전각이 비로전(毘盧殿)이다. 비로전의 주인공은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을 아미타불·석가불과 함께 삼신불(三身佛)의 형식으로 봉안할 때는 ‘대적광전’이라 하지만, 비로자나불만을 단독으로 봉안할 때는 ‘비로전’, 또는 비로자나불이『화엄경』의 교주(敎主)이므로 ‘화엄전’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광명이 우주에 가득히 비친다.’라는 뜻이며 부처님의 광명과 지혜가 걸림 없이 자유자재로 두루 비춘다는 의미를 지닌다. 전각의 모습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지녔다. 기단은 최근에 수리하였고, 미륵전과의 사이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아 뒤쪽의 금어선원으로 통하게 하였다. 안에는 목조 비로자나삼존불좌상을 봉안하고, 그 뒤로 후불탱을 배치하였다. 삼존불의 중앙은 비로자나불로 높이는 126㎝이고, 좌우에 이보다 조금 작게 조성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하였다.
관음전과 관세음보살,남순동자
관음전(觀音殿)은 본래 대웅전 왼쪽에 있었으나 1938년에 대웅전 오른쪽에 있던 금어선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이전해 건립하였다. 대웅전을 가운데에 두고 왼쪽의 지장전과 오른쪽의 관음전이 협시하는 듯한 구조이다. 관음전이 처음 건립된 것은 1613년(광해군 5)이다. 이 해에 여러 전각이 들어섰고, 백 여 년이 지난 1721년(경종 1)에 한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건물의 양식이 조선시대 말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때 대대적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만 공포대를 올린 주심포식으로 3개의 기둥에는 용두(龍頭)를 조각하여 익공을 받치게 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같은 시기에 건립된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팔상·독성·나한의 삼전과 유사하다. 소규모의 건물이면서도 장식과 조각이 매우 돋보이며, 특히 청기와 지붕과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안에는 목조 관음보살좌상을, 뒷벽에는 관음보살탱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보물 제 434 호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
대웅전(大雄殿)은 범어사 가람의 중심으로 조선시대 중기 불교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절의 창건과 함께 대웅전이 들어섰을 것이나,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 대웅전은 1614년의 창건과 1713년의 대대적 중건을 거치면서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래의 간결하고 힘찬 다포식 건축의 양식적 특성과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어서 보물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양식이다. 대규모의 건물에는 보통 팔작지붕을 올려 시각적으로 건물의 중량감을 감소시키지만, 예외적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의 불단에는 여러 가지 꽃무늬와 비천상(飛天像)들을 화려하게 조각 장식하였다. 그 위의 닫집은 아자(亞字)형 평면에 다포식 지붕을 올렸는데, 운룡(雲龍)과 극락조·비천상 등을 조각하였다. 이 불단에 석가여래좌상을 주존불로 봉안하였고, 그 뒤에 후불탱, 왼쪽벽에 삼장탱, 오른쪽 벽에 신중탱을 두었으며 석가여래좌상의 좌우에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다.
지장전
지장보살
대웅전 서쪽에는 1990년에 새로 건립한 지장전(地藏殿)이 있다. 절에는 본래 1657년(효종 8)에 최 씨 성을 가진 신도가 시주한 명부전이 있었으며 당시의 자리는 팔상전 앞, 지금의 서지전(西持殿) 자리였다. 그 뒤 1891년(고종 28)에 양화(兩華) 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88년 불의의 화재를 만나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지장전 안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목조 시왕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난 조각이어서 절로 환희심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화마에 사라졌다. 1990년에 대웅전 옆에 있던 탑을 일주문 옆 탑전으로 옮기고 지금의 자리에 지장전을 신축하였다.
크기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새로 신축하면서 대웅전의 양식을 본떠 다포식이면서도 맞배지붕을 올리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안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시왕상을 봉안하였고, 문 입구에는 금강역사가 있다.
팔상전, 독성전,나한전
팔상전(捌相殿)·독성전(獨聖殿)·나한전(羅漢殿)을 하나의 건물로 통합한 전각이다. 이처럼 유례가 없는 전각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본래 절에는 나한전과 팔상전이 별개의 독립된 전각으로 있었다. 나한전은 1613년(광해군 5)에 창건하였고 1705년(숙종 31)에 명학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는데 나한전 창건 무렵부터 팔상전도 있었던 듯하다. 그 뒤 1905년(광무 9)에 학암 스님이 팔상·독성·나한 삼전을 중건하고 성상(聖像)을 새로 조성하였다고 하므로 19세기 말 경에 통합 전각이 들어선 것이라 짐작된다.
크기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하나의 건물에 세 개의 전각을 수용하다 보니 정면의 규모가 커졌다. 건물의 왼쪽부터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이다. 중앙 문의 윗 부분을 반원형 통나무로 꾸며 놓은 것이 이채롭다. 팔상전 삼존불
팔상전에는 소조 삼존불을 중심으로 후불탱, 그리고 1978년에 조성한 팔상탱을 각각 좌우에 독성상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삼존불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는 문수·보현보살이다. 독성전 내부. 독성전에는 최근에 조성한 독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나한전의 석가삼존불
나한전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했는데, 중앙이 석가여래이고,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이 미륵보살이다. 삼존상의 뒤에는 가로 262㎝, 세로 206㎝의 영산회상도를 봉안하였다. 좌우 벽에는 16나한도를 봉안하였는데 모두 세 폭이다. 깊은 산중을 배경으로 계곡이 있고 꽃과 학·사슴·새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각각의 나한들은 책을 보거나 귀를 후비고, 또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였다.
산령각(山靈閣)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안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불화를 봉안하였다.
출입금지 구역의 요사
범어사 석등
높이 262㎝로 심검당 앞에 있다. 복련을 조각한 원형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竿柱石)을 올리고 앙련을 새긴 상대석과 화사석·옥개석, 그리고 보주를 차례로 얹었다. 이 석등은 후대에 많은 보수를 하여 화사석과 그 위의 옥개석만이 원래의 유물이고 나머지 하대석·간주·상대석은 모두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 화창(火窓)을 두었고, 그 주위에 음각의 틀과 못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창문을 달았던 흔적이다. 옥개석 역시 팔각으로 처마 끝에서 살짝 반전하였다. 현재 일부만 남아 있지만 고려시대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심검당
보제루
불이문에서 30여 단의 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웅장한 전각이 보인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름을 지닌 보제루(普濟樓)다. 불이문 앞에서 볼 때는 2층의 누각이지만,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의 건물이다. 즉 바깥쪽에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안쪽과 6~7m의 높낮이를 두었다. 우리 나라의 사찰이 산지가람을 이루면서 산 경사면을 조화롭게 이용하여 이러한 누각 건물을 많이 세웠는데, 범어사의 보제루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아래 기둥을 통해 대웅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좌,우로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보제루는 1699년(숙종 15) 자수(自修) 스님을 비롯하여 조헌(祖軒)·회영(懷英) 스님 등이 건립하였다. 기록으로 전하는 최초의 모습이지만 지세로 보아 그 이전에도 이러한 형식의 전각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후 1813년(순조 13) 신정(信定) 스님이 주관하고 만잠(萬岑)·관식(寬式) 스님 등이 중수하였고, 다시 1827년(순조 27)에도 일부를 중수하였다.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불이문쪽에 '범어사', 앞마당쪽에 '보제루',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절에서 대규모 법회를 거행할 때 예불과 법요식이 이 곳에서 이루어진다.
칠층석탑
성보박물관 앞에 있다. 본래는 대웅전 왼쪽에 있었으나 최근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인도의 스님이 기증한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3단의 기단에 7층의 높은 탑신을 세웠고, 1층 기단의 귀퉁이에 사천왕상을 놓았다. 탑의 주위에는 2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석재의 난간을 넓게 마련하였다. 전체적으로 우뚝 솟은 탑과 난간의 넓은 공간으로 불사리신앙의 장엄을 강조하였다.
성보박물관
석조물
580년 되었다는 높이 25m, 둘레 6.6m 인 은행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주차장 앞의 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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